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클랜드 전쟁 (문단 편집) ===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과 전운 고조 ===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포클랜드의 영유권 문제를 주제로 정기적인 회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82년 2월 27일의 회담을 마지막으로 3월 1일에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영유권 문제 해결 의사가 없다면 교섭을 중단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향후 모든 수단을 취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수단'이 포클랜드 무력 점령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82년]] 3월 19일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 콘스탄티노 다비도프(Constantino Davidoff)는 단순한 고철 수집을 명분으로 포클랜드 제도로 들어왔다. 문제는 이들이 마땅한 해상편이 없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해군 수송함에 타고 아르헨티나 국기를 올린 채 당시 포클랜드 제도의 일부였던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했다.[* 현재는 별개의 [[속령]]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들은 영국 정부로부터 방치된 포경 공장의 해체권을 얻었다고 주장했지만, 입국 절차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불법 상륙으로 취급되었다. 거기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상황에서 상륙한 것을 영국의 남극관측대원이 발견하고 이에 [[항의]]하고 본국으로 알리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위키피디아의 [[https://en.wikipedia.org/wiki/Invasion_of_South_Georgia|사우스 조지아 침략]] 항목 참고.] 국방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좀 더 자세하게 나오는데 고철상들에게 항의하러 간 기지 대원들은 의외로 순순히 사과를 받고 [[술]]도 얻어먹고 돌아왔는데 섬이라는 특성상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고 '감히 우리 땅에 깃발을 꽂아?'라고 빡친 강경한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민간 시설을 공격하고 건물벽에다 "[[대영제국]] 만세", "까불면 코피 터질 줄 알아라!" 같은 낙서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은 각각 수십여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이 대치한 것이 최초의 충돌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 [[중장]] 호르헤 이사악 아나야(Jorge Isaac Anaya, 1926 ~ 2008) [[제독]]을 중심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개전 시점을 8~9월 정도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빠른 전개에 당황했다. 8~9월로 준비하던 이유는 아르헨티나는 엑조세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쉬페르 에탕다르를 비롯한 주력 무기의 도입이 완료되는데 비해 영국은 퇴역시킬 예정이던 군함들이 실제로 폐기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반구는 겨울이라서 대형함정이 퇴역한 영국 입장에서는 [[브리튼 섬]]에서 겨울 바람으로 거칠어진 남대서양을 넘어오는 데 [[애로사항]]이 있어 영국이 반격하는 데 훨씬 불리해질 것이라는 나름대로 전략적인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3~4월에 경제난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다급해진 군부 정권이 국내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침공을 서둘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5dHsYhuXeZw|디스커버리 채널의 관련 다큐(영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